독서 2010/12/12 03:28

드디어 올 한해 마지막을 앞두고 큰 일 하나를 치러냈다. 그 동안 벼르고 별러오던 쇼펜하우어의 저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완독이 바로 그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소개하는 입문서는 두어 권 읽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칸트의 3대 비판서에는 못미치더라도) 거대한 하드커버 속에서 뿜어내는 두께와 사상의 난해함 때문에 읽으면서 몇 번이나 포기할까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 특히 이제 더 이상 학생 신분이 아니기에 책 읽는 데 전처럼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어 더욱 어려웠다. 매일 출퇴근버스 안에서 몇 장, 어쩌다 일찍 퇴근한 날 집에서 또 몇 장. 이런 식으로 깨알 같이 읽은 끝에 근 석 달만에 결국 완독해낼 수 있었다.

완독은 했지만 완독에 대한 기쁨보다는 아쉬움이 더 크다. 저자가 서문에서 직접 추천했듯이, 이 책이 다루는 '단 하나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번은 읽어야 할 것 같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이루는 커다란 두 축은 책의 제목에도 나오는 표상과 의지인데, 책의 서두에는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한 이 두 개념이 중반부를 지나면서 한데 엉키고 설키며 책 속의 공간을 정신없이 오간다. 덕분에 책을 읽으면서도 이미 읽었던 부분을 다시 들춰보거나 아직 읽지 않은 부분을 훑어봐야 할 일이 다른 책을 읽을 때보다 더 잦았다. 그래도 한 번 완독을 했더니 세부적인 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체적인 체계는 흐릿하게나마 감이 온다. 다만 그 형태를 보다 또렷하게 하기 위해서는 역시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 언제 또 이렇게 두꺼운 인문학 고전을 다시 들춰볼 수 있을만한 시간적인, 또 정신적인 여유가 생길지 알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책의 내용은 우울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도 그럴것이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의하면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은 실체가 아니다. 저 너머 어딘가에 있는 물자체, 즉 의지가 개별화되어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단지 우리를 둘러싼 세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 또한 하나의 특별한 표상이자 객관화된 의지에 불과하다. 그런가하면, 우리의 삶은 마르지 않는 고통의 샘으로 묘사된다. 의욕하면 의욕할수록 더욱 고통스러워지고, 잠시 의욕이 충족되면 이번에는 무료함이 밀려들어 다시 우리를 고통을 향해 떠밀고 만다.

이 모든 고리를 끊기 위해 쇼펜하우어가 제시하는 방법은 체념이다. 쇼펜하우어의 체념은 불교의 열반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언어가 주는 느낌 탓일까. 불교의 열반은 극단적일 정도의 긍정성을 담고 있는데 반해 쇼펜하우어의 체념은 그보다 더욱 음울하게 느껴진다. 비록 뒤따르는 설명에서 체념이 최상의 선인 이유를 나름의 방법으로 규명하지만 거기에서도 염세적인 의도가 강하게 묻어나기에 책의 결론은 더욱 우울하게만 느껴졌다.

쇼펜하우어는 이 책에서 자살에 대해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규정한다.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하지만 세계는 허깨비에 불과하고 삶은 고통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어느 누가 거기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덕분에 쇼펜하우어가 얻은 오명 중 하나가 자살옹호자라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객관과 주관의 관계에 대한 내용은 매우 인상 깊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변하지 않는 외부 세계(객관)이 존재하고 우리(주관)가 그것을 인식한다는 선후관계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그 반대로 주관이 존재하기에 객관도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객관과 주관의 순서를 바꾸었을 뿐인데, 이를 토대로 쇼펜하우어는 거대한 의지철학을 피워냈다. 조그만 발상의 전환이 이끌어낸 철학 사유의 깊이를 절감한 예였다.

칸트의 저작을 읽으며 대륙 합리론과 영국 경험론의 기가 막힌 절충에 놀랐다면,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으면서는 동서양 철학의 결합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놀랐다. 그의 철학 중 표상이 칸트의 사상을 기반으로 했다면 의지는 그가 스스로 밝힌 것처럼 인도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앞서 얘기한 체념과 열반의 유사성도 그렇고, 물아일체(物我一體)로 이미 표현된 바 있는 의지의 동일성도 그렇다. 인생이 곧 고통이라는 명제는 인도철학이나 불교사상의 기본 바탕을 이룬 바로 그것이다. 덕분에 동양문화의 영향 아래 있는 우리에게는 그의 철학적 개념들이 다른 서양철학자들에 비해 친숙하게 다가온다.

내가 읽은 번역본은 2009년에 새로 나온 것인데 곽복록 서강대 교수의 1987년 번역본에 비해 세련되고 현대적으로 옮겨졌다. 그러면서 분량도 많이 늘고 책값도 훌쩍 뛰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두께와 내용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본문 중 쉼표의 사용이 너무 잦아 독서의 흐름을 끊는 문제도 있지만 이 거대한 저작을 완역한 수고로움에 비하면 감내할 만한 수준이다.

그보다 곽복록 교수의 번역본에는 함께 실려있었던 부록이 빠졌다는 점이 특히 아쉽다. 본문 중 참고자료로 자주 언급되는 <충족근거율의 네 가지 뿌리에 관하여>나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는 다른 번역본이 출간되어 있어 따로 읽어볼 수 있다. 하지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부록은 쇼펜하우어의 칸트 철학 비판이 주내용인만큼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큰 중요성을 가지는 데 반해, 내가 아는 한 곽복록 교수의 번역본을 제외하면 따로 찾아볼 길이 없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2009
2010/09/21 - 2010/12/11
영풍문고 강남점 \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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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er★